"50인분은 되겠네."
지난가을 이삭 줍기 해온 콩으로 콩나물을 키워 몽땅 무쳐 놓고 하는 혼잣말이다. 콩나물을 살 수 있는 한국 식품점이 있는 도시는 캐나다에 몇 군데 되지 않는다. 그 외 지역에 사는 한인들에게는 콩나물은 쉽게 접 할 수 없는 식재료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잊고 살다가도 예측하지 못 한 때에 이따금씩 콩나물 생각났다. 먹고 싶은 식욕으로써의 떠오름이기도 하고, 콩나물이라는 명칭 하나가 감염 매개체처럼 나를 숙주 삼고 마음에 들어앉으면 잊혀 가는 사람들이 생생하게 기억에서 되살아나기도 하고, 얽혀 지나간 여러 감정들이 기억 창고에서 뛰쳐나오기도 한다. 콩나물은 평생이라는 긴 시간을 친숙하게 내 삶을 따라다니는 것 같다.
찬이라는 것을 제대로 만들지 못할 때부터 음식 좀 한다 할 그 어느 때까지에도 여전히 무슨 반찬을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은 늘 있었다. 그럴 때 콩나물은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식재료였던 것 같다. 밥상 위 반찬 메뉴에 시선 돌리지 못하도록 콩나물 무침 한 접시 푸짐하게 담아 밥상 가운데 떡하니 올려놓으면 우리 집주인 양반 기분에 따라 미간에 내 천자 더욱 선명하게 그리며 타박 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물린 밥상 위에 초라함이 느껴지도록 남겨있는 콩나물 접시, 하필 그날따라 메인 메뉴인 것처럼 밥상 중앙에 올려놓아 가뜩이나 불편했던 우리 사이를 더욱 삐걱하게 했었다. 사는 것도 매워 죽겠는데 콩나물에 그놈의 매운 고춧가루 좀 안 넣은 것이 무에 그리 대수라고, 존중을 빼고 욱하고 내지른 말 한마디가 벌에 쏘인 것처럼 쑤시고 뼈 속까지 시큰 거리게 했었다.
식구 수대로 라면을 다 끓이지 못하고 엄마는 라면 반 콩나물 반을 넣어 콩나물 라면을 끓여 준 때도 있었다. 그 기억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거리처럼 떠오르게 하기는 해도 가난으로 생각하지도 상처로 반응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아이들 아버지에게는 맑은 콩나물 국에도 심기가 불편해지는 사연이 있을 거라고 내 맘대로 생각하고 묻지 않았다. 물어봐 주고 마음을 달래어 주고 싶은 마음이 그때의 그 감정으로는 전혀 들지 않았다. 값싼 콩나물로 반찬 해 준다고 헐한 대접받는 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하며 속으로 빈정 거리기도 했다.
나는 모른 척하고 가끔 눈치는 보았지만 콩나물 반찬은 포기하지 않고 고춧가루 팍팍 넣어 고집스럽게 자주 만들었다. 그러나 손님을 초대하거나 시댁 어른 생신 상을 차릴 때는 콩나물의 머리와 꼬리를 다듬어 삼색이 도드라지도록 하는 냉채나 채 썰어 볶은 육고기를 넣어 만든 잡채를 보란 듯이 올렸다. 고춧가루가 아니어도 맛 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콩나물이라는 것을 알라고 그의 앞으로 콩나물 요리 접시를 슬쩍 밀어 놓는 것으로 복수가 되는 것 같아 만족스러워하기도 했었다. 그 시절의 옹졸한 나의 마음보를 알 수 있는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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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로 이주하고 콩나물을 얻기 위해 몇 번 콩나물을 길러 본 적이 있다. 물을 제 때 주지 않아 잔뿌리 투성이었고, 콩나물 대가리는 병든 것처럼 거뭇한 것들도 많아 다듬지 않으면 정 떨어져 바라보기도 싫은 모습으로 자라기 일쑤였다. 그렇게 콩나물을 키울 때마다 내 맘대로 잘 자라주지 않으니 "안 먹고 말지" 하는 심사로 불평이나 하게 하는 콩나물 기르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 제쳐 놓았었다.
제외된 일이란 것을 까맣게 잊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지난주에 콩을 물에 담갔다. 9시간은 집을 비워 가장 중요한 물 주기를 할 수 없는데도 대안 없이 콩부터 물에 담갔으니 되든 안 되는 콩나물을 키워야 했다. 면포를 깔고 그 면포가 습기를 느낄 수 있도록 소쿠리 바닥이 닿을락 말락 그릇에 물을 채웠다. 그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일주일 만에 콩나물은 시중 상품 못지않게 자랐다. 엄마에게 달려가 나도 그 옛날 엄마처럼 콩나물을 키웠다며 자랑하고 싶도록 볼품이 제법이었다. 도저히 뜨거운 물에 숨을 죽여 반찬을 만들기가 아깝고 좀 더 자랑을 하고 싶도록 인물 좋은 콩나물이었다.
수 십 년이 지나 아득해서 아스라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메주를 만드는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동짓달 방안의 풍경이었다. 둥근 양은 밥상 위에 콩을 얇게 펴 놓고 벌레 먹은 것, 쪽이 나간 콩, 가끔씩 섞여 있는 돌을 골라내는 엄마를 아버지가 거들고 나서면 다음 날 어김없이 콩 삶는 냄새가 집안을 채웠다. 어쩐 일로 아버지 손길 빌리지 않고 엄마 혼자 쉬엄쉬엄 할 때가 있는데, 그때는 콩나물을 키우기 위해 콩을 고른다는 것을 몇 해를 거듭하면서 알아졌다. 특히 정월 초 아버지 생신이 가까우면 엄마는 콩나물을 커다란 오지 시루에 가득 키웠다.
아버지 생신이 아니어도 고구마 순이 나올 때쯤에도 엄마는 콩나물을 키웠다. 콩나물이 시루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아주 어릴 때, 엄마에게 콩나물 자라는 곳이 어디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때라 하루 종일 흙바닥에 앉아 공깃돌 놀이나 하던 꼬맹이가 무슨 호기심으로 콩나물 자라는 것을 궁금해했는지 그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얼추 그때를 기억해 보면 콩나물 반찬을 좋아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할 뿐 이유는 딱히 알지 못하겠다.
콩나물을 다듬던 엄마가 일러준 대로 콩나물이 자라고 있다는 밭으로 냉큼 가 보았다. 엄마의 밭은 울안에 있지 않고 동네 어귀에 들판처럼 너른 공터에 있었다. 그곳까지 콩나물 자라는 것을 보기 위해 뛰어갔다. 어쩌면 밭에 콩나물이 아직도 많이 남았는지 확인하러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구마 순과 콩나물을 섞어 잡채를 만들기 위해 콩나물을 한꺼번에 많이 다듬어 놓은 것을 보는 순간, 콩나물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하였던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달려갔던 밭에는 대파 고랑을 지나고 상추 곁도 지나 아욱 근대 열무 밭고랑 사이를 다 둘러보아도 콩나물이 보이지 않았다. 어린 마음이어도 엄마에게 빨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또 숨이 차도록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 큰 일 났어. 누가 콩나물을 다 뽑아 갔어. 밭에 콩나물이 없어"
엄마를 웃게 했던 그 일 이후의 꼬맹이는 어느 날 부엌의 주인이 되었다. 엄마처럼 콩나물을 키우지는 않았지만, 찬 거리 장 바구니에 콩나물을 빠트리지 않고 담아 왔다. 다른 식재료보다 유독 콩나물을 살 때면 기분이 좋았다. 푸짐하게 담긴 콩나물 봉지를 건네 주려다가 한 움큼도 아니고 콩나물 몇 가락을 덤이라고 생색내며 얹어 주는 상인의 제스처도 후한 인심으로 느껴졌고, 그 작은 감정은 쥐어짜며 생활해야 했던 쪼그라진 마음을 쭉 펴게 하는 에너지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이런 기분은 캐나다로 이주한 후부터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뜨문뜨문 한 번씩 가는 한국 식품점에서 사 오는 콩나물은 한 번에 한 봉지 덜컥 쏟아 무침을 해 먹으려면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덤을 주던 상인의 것처럼 적은 분량의 콩나물로 국도 끓이고 다른 야채와 섞어 콩나물 무침을 만들기도 했다. 도시가 가깝지 않은 곳에 사는 일부 한국 교민들은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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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식품점을 할 때였다. 육류와 냉동 생선까지 취급을 하니 음식을 만들 식재료는 처지고 넘쳤다. 그럼에도 "뭐 해 먹지?" 하는 말을 자주 했었다. 김치 빠진 밥을 먹는 것 같고 당기는 맛이 없을 때면 시원하고 얼큰한 콩나물 국이 생각날 때가 많았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하다가 한국 식품은 아니어도 몇 종류의 한국 과자라도 취급하자는 아이디어가 아들과 대화 중에 나왔다. 한국 마켓 본사에서 보내준 취급 목록은 대형 마트를 위한 것이어서 매장의 규모를 생각지 않는다면 이마트 부럽지 않은 주문을 할 수도 있었다. 냉동고를 따로 매장 구석에 구겨 넣고 송편에서 순대, 만두, 붕어빵까지 냉동식품까지 배달받았다. 목록을 보고 추려 고른 품목으로 겨냥 소비자는 우리 집 식구였다.
우리 먹자고 벌인 일이지만 물품을 배달받고 보니 그 양이 시골에 전빵 2개도 오픈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우리 동네는 물론 옆 동네까지 손을 뻗어 13 가구의 교민 가정에 한국 식품 있다는 홍보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민 한 분이 반가운 마음으로 즉각 달려왔다. 30년 가까이 캐나다에 거주하면서 한국 식재료 구입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3시간 거리를 마다 하지 않고 한국 식품점에 간다고 하던 그분이었다. 콩나물은 어디 있냐고 묻기부터 하는 걸 보니 당연히 콩나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온 모양이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냉동 제품과 장류까지 갖췄으니 아쉬운 대로 교민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었다. 한국 식품을 들이고 개시해줄 손님이 왔는데, 그 귀한 첫 번째 손님에게 그것은 없다고 하려니 호기롭게 한국 식품 있다고 전화한 일이 민망하기까지 했다. 사실 주문을 넣을 때 콩나물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서양인은 숙주나물은 먹어도 콩나물은 먹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식구가 아무리 콩나물에 한이 맺혀 끼니마다 콩나물만 먹는다 해도 한 박스의 콩나물 50 봉지는 무리여서 제외했던 품목이었다.
그분 덕분에 2주마다 콩나물 주문도 하고 매끼 우리는 콩나물 한을 풀었던 그때의 일화가 오늘 콩나물을 보니 다시 떠오른다. 그 동네에서 교류하며 지내던 교민들의 얼굴도 한 분 한 분 스치고 지나간다. 콩나물 감상을 마치고 그 많은 양을 한꺼번에 내 방식대로 무침을 했다. 콩나물 무침은 고춧가루 맛이라고 했던 남편의 말이 들리는 듯했다. 지금 마음만 같아도 "그럴 리가"라고 말대꾸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지나간 일들이 시간의 옷을 껴 입고 희미하게 빛바래진 탓이겠지.
내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기억 창고에 몇 단어만 남는다면 그 몇 단어 중에 '콩나물'이 있을 것 같다.
예쁘게 잘 자란 콩나물 덕분에 지나간 긴 세월의 많은 기억을 한꺼번에 떠올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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